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직봉전쟁 (문단 편집) === 4거두 회의 === 한편 리춘이 죽고 난 이후 호북독군 겸 양호순열사 [[왕잔위안]]이 장강삼독의 영수가 되어 남방의 실력자로 행세하게 되었다. 왕잔위안은 충칭진수사 겸 천군 총사령관 [[류샹]]과 천악연방조약을 체결하고 또한 호남독군 겸 상군총사령관 [[자오헝티]]와 상악연방조약을 체결하여 서남과 남방의 경계를 안정화한 다음에 중앙정치에 적극 개입하였다. 이에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진윈펑 외에 왕잔위안 역시 초청하여 4거두 회의에 참석하게 했다. 4거두 회의는 1921년 톈진에서 개최되었는데 여기에 참석하기 위해 장쭤린은 총참모장 허란주, 일본 고문 마치노 다케마 중교 등을 대동하여 4월 15일 봉천을 출발, 텐진으로 갔다. 장쭤린 일행은 4월 16일에 톈진에 도착했고 오후 6시, 장쭤린이 머물고 있던 조가화원에 차오쿤이 찾아와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회의에는 장쭤린, 엽공장, 왕내빈, 장징후이, 차오쿤, 차오쿤의 동생 조예가 참석하였고 4월 18일에 두번째 만남을 가지기로 했다. 4월 18일, 차오쿤을 만난 장쭤린은 대뜸 소리쳤다. >"[[차오쿤|형님]], 형님은 [[장쭤린|친척]]이 친합니까? [[우페이푸|부하]]가 친합니까? 나는 절대로 형님을 지지할 것입니다. 만일 다른 말이 있게 되면 총알에 맞아 죽을 것입니다." 이는 사돈인 자신이 우페이푸보다 더 가까이해야 할 인물이 아니냐는 소리였다. 이어 하남성에서 벌어진 변란을 정리하고 온 왕잔위안이 4월 25일 아침에 톈진에 도착하면서 텐진에 4거두가 모두 모이게 되었다. 회의는 4월 27일에 정식으로 개최되어 조가화원과 황기덕 군의장에서 번갈아가며 열렸는데 4월 27일에는 광동에서 [[쑨원]]이 비상대총통에 취임한 것에 대한 대응 문제를 논하기 위해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 외에 각성의 32명의 군민장관이 참석하였다. 이어 4월 28일에는 재정 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자리에서 진윈펑과 조예가 찻잔을 집어던지며 욕설까지 퍼부으며 싸웠고 화가 난 진윈펑이 사직서를 제출했다. 4월 29일에 장쭤린, 왕잔위안, 차오쿤, 진윈펑이 술을 마시며 화해의 시간을 가졌고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이 내각 지지 성명을 발표, 진윈펑의 체면을 세워주면서 진윈펑은 사직을 취소했다. 5월 1일, 다시 한번 4거두 회의가 소집되어 내각의 인원과 재정 문제를 협의했고 5월 2일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과 각부 총장들이 마지막으로 회의를 열어 각 항목에 대한 문제를 결정, 5월 5일 진윈펑이 베이징으로 돌아가 쉬스창에게 회의 결과를 보고했고 텐진에서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이 순열사의 명의로 내각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5월 6일 쉬스창은 장쭤린, 차오쿤, 왕잔위안을 베이징에 초청해 연회를 베푸는 한편 이들에게 회의에 대한 보고를 받았다. 4거두 회의에서 차오쿤은 왕승빈을 하남독군으로 추천했고 또한 안휘군벌 출신인 섬서독군 진수모가 몰락하자 그 후임으로 염상문을 추천했다. 반면 장쭤린은 허란주를 추천했으나 섬서에 많은 부대를 주둔시킨 상태였던 염상문이 섬서독군이 되었다. 그 대신에 직계는 장쭤린에게 외몽골 정벌을 구실로 몽강 경략사 자리를 만들어 주어 열하, 차하얼, 수원을 통괄하게 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리고 산동독군 [[톈중위]]의 후임으로 직계는 왕승빈을, 봉계는 포귀경을 추천하였는데 결과적으로 중립적 성향의 정사기가 임명되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